주성치와 프로이트
요즘 프로이트의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를 두번째 읽고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무슨 말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두번째 읽으니 조금은 알거 같더군요^^ 하지만 역시 어렵습니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웃음론’이라기 보다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증상 중 한가지로 거론한 ‘농담’에 대한 책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프로이트의 웃음론]이 아니고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입니다. 즉, 이 책은 웃음에 관한 책이 아니라 무의식에 관한 책입니다.
주된 내용은 무의식이지만 책 뒷부분에서는 일반적인 ‘웃음론’이라 할만한 내용도 등장합니다.
이 책의 프로이트 이론에는 중요한 전제들이 깔려있습니다. 이 전제들 없이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를 읽는다면 뭔 얘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전제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 개념인 ‘리비도 경제학’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이 정신적-육체적으로 활동하고 살아가는데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리비도’입니다. 그런데 리비도라는 에너지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게 아니라 효율적으로 잘 유통되어야만 정신적-육체적으로 건강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치 화폐가 특정한 부분에 쏠리거나 부족함 없이 원활히 유통되어야만 경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리비도는 화폐(비용)의 성격을 갖고있습니다. ‘리비도 경제학’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웃음’이라는 인간 정신의 활동도 리비도 경제학으로 설명됩니다.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웃음은 ‘어떤 특정한 조건들 때문에 에너지(비용)가 사용되지 않고 절약되어 밖으로 방출되는 현상’입니다. 방출되는 이유는 경제학적인 고려때문입니다. 잘 흘러가야 좋은 것이지,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한 곳에 정체되어 있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정신병, 신경증이 발생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프로이트 웃음론의 두 번째 전제는, ‘웃음’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농담, 희극, 유머를 구분합니다. 웃음을 이렇게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사람은 프로이트 말고는 없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구분합니다. 마치 구분되는게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구분의 기준은 ‘에너지가 절약되는 맥락의 차이’입니다.
프로이트는 농담, 희극, 유머를 아래처럼 구분합니다.
1. 농담 : 뭔가를 억압하고 억제하는데 쓰이는 에너지가 절약되는 것
2. 희극 : 뭔가를 머리속에 그리는(표상, 상상)데 필요한 에너지가 절약되는 것
3. 유머 : 어떤 감정(분노, 연민 등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절약되는 것
자, 이렇게 프로이트의 웃음론은 2개의 전제를 깔고 전개됩니다. 첫 번째 전제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 이론입니다. 두 번째 전제 또한 프로이트의 독창적인 가설입니다. 웃음에 관해 연구했던 다른 어떤 서양 학자들의 연구에도 없는 독특한 이론입니다. 물론 프로이트가 옳고 다른 학자들은 틀렸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독특한 이론이라는 얘기입니다.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농담과 희극은 비중있게 다뤄집니다. 농담은 이 책의 핵심 주제였고, 희극은 농담만큼은 아니어도 비교적 상세히 설명됩니다. 그런데 유머는 책 뒷 부분 겨우 몇페이지에서 짧게 다뤄집니다. 그렇다고 얼렁뚱땅 얼버무리는 것은 아니지만 농담과 희극에 비해서는 상당히 적은 분량으로 설명됩니다.
유머의 사례로 드는 것이 그 유명한 ‘사형수 유머’입니다. 형 집행장으로 가는 도중 사형수가 하늘을 보며 얘기합니다. ‘아, 이번주는 시작이 좋은 걸!’
곧 죽을 사형수가 내뱉은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웃습니다. 사형수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유지하는데 드는 심리적 비용이 웃음으로써 절약되고 방출됩니다.
다른 종류의 사형수 유머도 있습니다. 곧 참수형으로 처형될 사형수가 추운날씨에 감기걸릴 걱정을 하며 간수에게 목도리를 달라고 요청 합니다. 이 때도 우리는 웃습니다. 곧 잘릴 목인데 감기 걱정이라니 ㅋㅋ
지금까지 서론이 길었군요^^ 본 칼럼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유머'(감정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나오는 웃음)의 또 다른 사례입니다. 위에서 예를 든 ‘사형수 유머’로도 어느 정도 설명되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홍콩 영화배우 ‘주성치’ 영화의 웃음코드에서 프로이트가 말한 ‘유머’를 심심챦게 발견합니다.
주성치가 선사하는 웃음코드 중에는 관객(또는 상대 배우)에게 ‘연민의 정'(페이소스)을 불러일으킨 후에 그 감정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슬랩스틱이나 말장난, 표정술때문에 웃긴 경우도 많지만 주성치를 주성치답게 만드는 독특한 웃음코드를 꼽자면 연민의 감정을 다루는 기술입니다. 바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유머’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페이소스를 다루는 기술의 원조라면 역시 찰리 채플린이겠죠^^
프로이트의 유머 이론은 주성치의 많은 영화들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만 골라서 적용해보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007 북경특급>입니다. 중국 본토의 비밀 요원 007(주성치)이 또다른 비밀 요원 이향금(원영의)과 함께 겪게 되는 첩보전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007은 비밀 지령을 받고 홍콩에 급파되고 이향금과 접선하여 함께 활동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는 음모였고 이향금은 비밀리에 007을 암살하라는 또다른 지시를 받은 상태입니다.
영화내내 다양한 웃음폭탄이 터집니다. 프로이트의 유머 이론을 설명하기 적당한 부분은, 이향금이 몰래 007을 저격한 후 죽은 줄 알았던 007이 이향금에게 나타나자 이향금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주는 장면입니다. 영화가 다 그렇듯이, 이향금은 007을 사랑하고 있었고 상부의 지시때문에 어쩔수 없이 007을 쐈지만 괴로워하던 참이었습니다. 영화의 스틸 사진을 보실까요?
007이 망치와 연장을 이향금에게 주면서 어서 총알을 빼내라고 합니다. 이향금은 “마취도 안하고 빼요?”라고 묻습니다. 마취도 안한 상태에서 총알제거 수술을 받아야 될 처지에 있는 007…관객들은 007이 불쌍하다는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007은 비디오 테잎을 건네면서 이것이 바로 마취제라고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알고 보니 그 테잎은 야동이었습니다. ㅋㅋ 마치 삼국지에서 관운장이 바둑을 두면서 독화살 제거 수술을 받는 장면의 패러디 같습니다. 암튼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007에 대한 연민의 정을 거두고 빵 터집니다. ㅋㅋ
다음 장면을 보실까요?
야동을 마취제 삼아 견디고 있지만 극심한 고통에 점점 지쳐가는 007…
이향금 : (어쩔줄 몰라하며 흐느낀다.) 미안해요. 피가 많이 흘러요
007 : 혈관을 건드렸군…
이향금 : (당황하며) 그럼 어떡하죠? 견딜 수 있겠어요?
007 : 계속 말을 걸어, 잠들지 않게..잠들면 다신 못깨어날거 같아…
야동때문에 웃었던 것도 잠시, 다시 상황은 심각해 집니다. 관객들은 007에게 다시 연민의 정을 갖게 됩니다.
이향금 : (흐느끼며) 알겠어요. 당신이 잠들지 않도록 말을 걸겠어요..당신의 이름은 뭐죠?
007 : 007…(잠시 생각) 좀 더 수준 높은 질문을 해 봐
관객이 느끼는 연민의 감정은 절정에 도달합니다.
이향금 : (흐느끼며 잠시생각) 수준높은 질문이라…닭이 오리보다 4배 더 많고, 오리는 돼지보다 9마리 적고 오리와 돼지를 합쳐 67마리라면, 동물의 다리는 모두 몇 개죠?
007 : (황당) ???
수준 높은 질문을 해달라는 007의 말에, 이향금은 황당하게도 수학의 일차 방정식 문제를 내고있습니다. ㅋㅋ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또 한번 빵터집니다. 마지막에 주성치의 황당하다는 얼굴표정이 압권입니다.
관객이 느끼는 연민의 정이 최고조에 달했을때 그 상황을 웃음으로 바꿔버리는 이러한 기술들이 주성치 영화의 웃음코드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기술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유머’입니다.
자, 프로이트의 어려운 정신분석학 이론도 우리가 즐겨보는 주성치 영화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논술개그는 이러한 상황들을 계속 발굴하고 연구해서 더 좋은 공연 콘텐츠로 만들어 보겠습니다.^^